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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희년교회

희년(禧年·The Jubilee)은 50년만에 잃었던 땅을 되찾고 노예가 풀려나는 은혜의 해입니다(레위기 25장).
안식·해방·복권의 희년은 시공을 뛰어넘어 요청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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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 16일 설교: 부활을 살라

작성자 : 운영자  /  등록일 : 2017.04.19 (15:36)  /  조회 : 4,861
지난주일 설교요약
부활을 살라

고린도전서 15:53-58
53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54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55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56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57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58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아침에 부활하셨습니다. 고난을 이기시고, 원수를 이기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계절도 또한 부활의 계절입니다. 지난 겨울 동토에 얼어붙었던 자연들이 부활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이른비 같은 봄비가 내림으로써 만물이 단단한 땅을 뚫어내고 올라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에도 새로운 생명이 솟아나오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소생하고, 건강이 회복되고, 생업이 단단한 땅을 뚫어내고 솟아오르기를 부활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은 한번 태어나서 죽는 것이 인생의 이치라고 히브리서 9:27절에서 말씀하셨지만, 죽음이란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가 뭔가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도, 죽음으로 어느 순간에 다 없어질 것을 생각하면, 인생이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고, 절망하게 됩니다. 또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 것을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죽음의 절망과 공포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역사적으로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죽음의 절망과 공포를 다 짊어지고 살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상가가 있고요, 죽음에 순응하며 살라는 사상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원자이신데요. 그는 죽음에 절망하지도 않으셨고, 죽음에 순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는 오히려 부활로 죽음을 극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죽음의 절망과 공포를 이기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사실이 믿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과학으로 증명이 되어야 믿을 수가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5:5절 이하에 보면, 게바, 11제자, 야고보, 바울, 그리고 5백명이 동시에 예수님을 목격했습니다. 마태복음 28:9절에 보면, 무덤 앞에 갔던 두 여인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습니다. 한 두 명이 본 것이 아니에요. 500명이 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으라” 축복의 말씀도 하시고 자기 몸을 만져보게도 하시고, 식사도 하셨습니다. 허깨비가 아니었다는 거죠.  
   그러나 사람들은 과학으로 증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과학이란게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강남구청 부근, 밀알교회에서 제가 한번은 설교를 했습니다. 그 교회 장로님 중에 지금은 은퇴하신 연세의대 교수이신 장로님이 계신데, 그분은 자기는 과학적 방법을 따르지만, 부활을 믿는다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는 젊었을 적에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를 하면서,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봤다고 합니다. 사람은 몸 속에 심장으로부터 피를 나르는 굵은 혈관이 있다고 해요. 사람이 죽으면 그것이 식으면서 그 관에 있는 피가 금방 굳어버린답니다. 그래서 딱딱해지는데, 다시 살 수가 없답니다. 그 굳은 혈관이 녹아서 다시 피가 흘러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환자는 죽고는, 몇 시간이 넘어, 혈관이 다 굳었을텐데, 신비롭게도 살아나더라는 거예요. 응급실에서 그런 경우를 여러 번 봤다는 겁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는 과학이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 많다며, 자기는 부활에 대해 더 큰 확신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과학을 너무 신봉하지 마세요. 과학은 우리가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하지만, 모든 것을 과학으로 검증돼야 한다는 과학실증주의는 신봉하지 마세요. 과학은 영적인 세계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내가 부활을 진짜로 봤소“하는 말을 삶으로 증명해 보여줍니다. 그 중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는데요, 12명중 예수님을 밀고하고는 죄책감에 자살한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나머지가 11명입니다, 이들은 제자들이었지만, 예수님에게 그렇게 충성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같이 죽자고 하면, 다 도망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증거가요, 예수님이 잡히실 때요, 이들은 다 도망쳤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는, 그들은 부활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래서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를 당하면서 까지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했습니다. 한두 사람이 아니에요. 열한제자, 그 중에 빠진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모두가 다 순교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는데, 허깨비를 보고서, 목숨을 버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도 모두가 다 버릴 수 있겠어요? 그들은 정말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전하면 죽인다고 해도 복음을 전한 것이에요. 이보다 더 확실한 부활의 증거는 없습니다.
   바람이 분다는 증거는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집 안에 있으면서도 창밖으로 나뭇가지가 흔들리면 바람이 부는 것을 아는 거예요. 예수님이 부활을 했다는 사실은 부활을 본 제자들의 삶을 보면, 아는 거예요. 여러분, 이 시간 성령께서 여러분들과 함께하셔서,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그는 예수 믿는 자를 잡아다가 고발하고 죽이고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귀에 포착되면, 가만두지 않는, 핍박에 미친 사람이었어요.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는, 180도 변해서, 예수님을 위해 순교를 하잖아요. 그가 오늘 55절에서 말합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이러잖아요. “죽음아, 너는 결단코 믿는 자를 이길 수가 없어.” 이런 뜻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환상 가운데 본 그의 고백입니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죽음을 우리가 이길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보여주셨어요. 저 제자들과 사도 바울을 보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부활한 자의 첫 열매가 되셔서, 죽음을 극복하고, 우리에게 부활할 것이라는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첫 열매를 보면서, 우리는 이어서 열릴 풍성한 열매들을 예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죽음 이후에는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23절에 보면 이럽니다. “각각 제 차례대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이제 순서가 돌아와서, 믿는자들이 다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을 믿으시고 죽음의 절망과 공포를 극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는 이제 부활신앙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부활신앙이란, 부활할 것을 믿고, 그것을 적용해서 오늘을 당당하게 자신있게 사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신앙으로 살았는데, 그들은 그 어떤 죽음도, 그 어떤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을 믿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며 교회를 형성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탄생되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 부활절이 오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부활을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부활신앙의 공동체입니다.
   청송교도소장이었던 박효진장로님이라고 있습니다. 그분의 간증을 읽었는데요, 그 장로님은 사형수를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생겨서 사형수에게 주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어떤 사형수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그는 복음이 안들어가더래요. 보니까 이미 도사처럼 평안을 누리고 있더라는 거예요. 마치 죽음을 초월한 사람처럼 그렇더래요. 그 모습에 다른 재소자들이 그를 존경하더래요.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사형장으로 가는데, 교도관들이 그를 부르자, 죽지 않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교도관을 때리며 난리를 피우더라는 거예요. 그는 겉으로 평안한 것 같았지만, 그날까지 절망과 공포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사형대에로 향해 걸어갈 때, 일반적으로요, 이미 다 죽어있대요. 소변, 대변을 다 바지에 싸고요, 정신은 없고, 다리에 힘이 빠져서 걸어가지 못한답니다. 교도관들이 부축해서 끌고 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이 또 다른 사형수 유두영이라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는 복음을 믿고는 사형당하는 아침, 교도관들이 부를 때, 그는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이제 간다”고 “잘 지내”라고, “예수님을 꼭 믿으라”고 그렇게 평안하게 가더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사형을 당할 때, 자기 때문에 피해당한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는, 혹시 내 시신에서 뭔가 사용할 것이 있으면, 다 사용하라고, 자기를 다 기증하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짧은 시간이지만, 부활을 이 세상에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가 풀렸기에 사는 것이 달라진 거예요.
   고후4:8절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에 죽고 살고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마음이 괴로워지는데, 부활을 사는 사람은 그것을 다 이길 수가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기에, 오늘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기쁘게 살 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고 축복해 주실 것을 믿으며 이 세상에서는 열심히 살 뿐입니다. 열매가 조금 작다고 괴로워할 것도 아닙니다. 부활을 사는 사람은 언제나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대로 기뻐하며 그렇게 여유롭게 사는 거예요. 질곡의 인생사가 나를 장악하지 못해요. 이기며 살게 됩니다. 이런 기쁜 삶을 여러분들이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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