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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희년교회

희년(禧年·The Jubilee)은 50년만에 잃었던 땅을 되찾고 노예가 풀려나는 은혜의 해입니다(레위기 25장).
안식·해방·복권의 희년은 시공을 뛰어넘어 요청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주일의 설교잠실희년교회에 오신걸 환경합니다.

7. 16일 설교: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작성자 : 운영자  /  등록일 : 2017.07.20 (13:47)  /  조회 : 5,849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마태복음 7;15- 21
15 “거짓 예언자들을 살펴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 16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19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 20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거짓 예언자의 말은 나쁜 열매를 맺는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설교 중의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곳이 갈릴리 근처의 한 작은 산 위였기 때문에, 산상설교 혹은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그 산상에서 예수님은 세상과는 아주 다른, 기독교 윤리의 핵심을 여기서 설교하셨는데,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라.’ ‘온유한 자가 되라.’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왼쪽도 돌려대라.’ ‘원수를 사랑하라.’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었습니다. 이 윤리규정 하나하나를 살펴보면요, 모두가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과는 반대되는 윤리입니다.
   오늘 봉독한 부분은 바로 이 산상설교의 결론부분입니다. 산상설교가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인데, 오늘 본문은 7장 후반부입니다. 바로 이 결론부분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느냐면요, “거짓 예언자를 살펴라.” 여기서 ‘살피라’는 말은 ‘조심하라’는 말인데요, 그러니까 “거짓 예언자를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길,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열매로 알 수 있는데,,,, 그들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거짓 예언자를 조심하라. 왜냐? 그들을 따랐다가는 인생의 열매가 좋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예언자를 조심해야 하는데, 그 거짓 예언자는 누구일까요? 예수님이 산상에서 윤리를 한 가지 한 가지 말씀하시고는, 거짓예언자를 조심하라고 했기 때문에, 산상설교의 내용과 연결해서 거짓예언자가 누구인지를 규정해야 하는데, 그렇게 보면, 산상설교의 윤리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달리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을 따라라.”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거짓 예언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되지 말고 강한 자가 되라. 오른손으로 행한 것을 늘 자랑해서 너의 선행을 알게 하라. 누가 너의 오른뺨을 때리거든, 너는 더욱 강하게 그의 왼뺨까지도 때려, 2배로 갚아 주어라. 원수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쳐내라. 늘 남을 비판해라. 네가 올라가리라.” 뭐, 이런 주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진리가 아니라 거짓이라는 겁니다.
   왜냐? 왜 진리가 아니고 거짓이냐? 그들의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그들의 열매가 아주 나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열매하면, 영혼의 열매라고 할 수 있어요. 내적인 기쁨, 영혼의 열매요. 그렇게 살았는데, 영혼이 잘 되지 못하고, 마음에 평화가 오지 못하고, 불행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짓이지요. 진리가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세상적인 방법은 너에게서 행복을 빼앗아가는 이리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저 거짓 예언자들을 따랐다가는 나쁜 나무가 되고, 그래서 나쁜 열매, 불행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좋은 열매를 맺어 행복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은 좋은 열매만 맺는 멋진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인생을 위해 좋은 나무가 되라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나무가 좋은 나무냐? 본문에서는 좋은 나무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이고, 나쁜 나무는 가시나무와 엉겅퀴 같은 나무가 있다고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는데요, 성경에서 나쁜 나무의 상징인 가시나무는 어떤 나무예요? 가시나무는 가시가 덕지덕지한데, 가까이했다가는 찔립니다. 양을 치는데, 가시나무 때문에 양들이 상처를 받아요. 다른 존재에게 유익은 주지 못하고 찌르기나 하는 존재잖아요. 이것이 나쁜 나무입니다.
   또 엉겅퀴는요, 다른 것이 자라지 못하게 땅을 많이 차지합니다. 자리를 차지하자마자, 옆으로 막 뻗어요. 그래서 엉겅퀴가 많은 곳에서는 다른 식물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나쁜 나무의 특성입니다.
   그런데요, 좋은 나무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어떻습니까? 그 나무들은 사람들에게 달콤한 과일을 선사합니다. 자기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나무입니다. 열매라는 것은 언제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합니다. 아주 달콤한 열매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이것이 좋은 나무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이런 좋은 나무가 되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열매를 맺으면 남이나 좋은 일시키고, 자기는 불행할 줄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좋은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겁니다. 이것이 진리라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우리는 좋은 나무로 변해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어서, 먼저 우리가 행복하고, 또 지치고 목마른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서 우리의 열매를 맛보고 행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에요. 이렇게 좋은 나무가 되어 좋은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교회는 이런 좋은 나무들이 군집을 이루는 숲이어야 합니다. 등산을 하다 보면요, 소나무나 편백나무들이 모여있는 숲에는 사람들이 그 아래서 앉아 쉬기도 하고, 돗자릴 깔고는 낮잠을 자기도 하고, 밥을 먹기도 합니다. 그 나무가 피톤치드를 내는 좋은 나무인 것을 아는 것이지요. 거기서 즐기고, 거기서 치료받고, 거기서 좋은 기운을 받아갑니다. 그것을 보고서, 제가 ‘저 좋은 나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나무들을 보니까요, ‘나무가 가지를 축 늘이고 있는데, 제 눈에는 그 나무가 긴장을 다 풀고 웃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행복해 하는 것 같아요. 나무를 보면서 제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교회는 그런 좋은 나무의 숲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숲에 모여들고 싶을 거예요. 우리 교회가 그런 좋은 나무들의 숲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지친 사람들, 나약한 사람들이 와서, 쉼을 얻고, 치료를 받고,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나무는 긍휼한 나무이다
   그러면 좋은 나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산상설교의 결론부분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신 건데요, 산상설교를 읽어보면, 좋은 나무는 긍휼한 마음을 가진 나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산상설교는 한 마디로 긍휼의 윤리입니다.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며 행동하라.” 이거예요. 산상설교를 읽어보면, 모든 것이 이 긍휼한 마음을 가지면 가능한 윤리입니다. 그러나 긍휼함을 가지지 않으면 하나도 실행할 수 없는 윤리예요.  
   그래서 우리가 좋은 나무로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긍휼을 담은 나무요, 긍휼을 열매맺는 나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 긍휼로 나눠주고, 실수한 사람을 보면 긍휼로 감싸주고, 원수마저도 긍휼로 사랑하고, 그러니까 좋은 나무는 긍휼이 넘치는 나무인 거예요.
   예수님이 하루는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잡은 간음한 여인을 잡아와서는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간음이란 죄는 대단히 큰 죄인데요, 그래서 목격한 사람들이 즉석에서 처형이 가능한 죄였습니다. 그런 관습에 따라 사람들이 돌을 든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합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그러자 그들이 한명씩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때 저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따질 말이 많았을 거예요. ‘나는 그렇게 돌로 맞을 짓 정도는 하지 않았어요.’ 거나 ‘간음한 사람을 그냥 두면, 간음이 증가할 것이고, 그러면 가족이 무너지고, 이스라엘 민족공동체가 무너질 것입니다.’ 그렇게 논리적으로 말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요, 예수님은 여기서 긍휼을 선택합니다. 단죄해도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긍휼을 선택해요. 긍휼을 선택하지 않으면, 생명이 죽어야 하니까요. 살림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저 여인에게 긍휼을 베풀어서 그 여인을 살리는 일을 선택합니다.
   긍휼이란 말은요, 히브리어로 두 개가 있습니다. 헷세드와 라함인데요, 여기서 라함이란 말은 렉헴이라는 말이 어원인데요, 이 렉헴은 자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요, 긍휼이라는 말은 자궁이란 말에서 나온 거예요. 자궁은 생명을 키우는 따뜻하고 안락한 곳이잖아요. 긍휼은 생명을 키우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긍휼은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요, 예수님은 정죄하고 보복할 일 앞에서, 생명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살리는 길을 선택하신 거예요. 그리고 우리에게도 살리는 길을 선택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거리에는 거지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들에게 돈을 주면, 거지근성이나 키워주는 것이기 때문에, 돈을 줘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분명 게으른 거지근성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에서 보면, 일단 살리는 것이 긍휼입니다. 따지고 대책을 세우는 것은 관계당국에서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그런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공적으로 직업 속에서 열심히 분석하면서 대책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는 긍휼한 마음으로 그들을 봐야 합니다. 긍휼한 마음으로 살려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윤리입니다. 따지는 일은 관계당국에게 맡기고, 우리는 긍휼함으로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살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긍휼을 선택해야 합니다.  

긍휼해지기 위해서는
   그러면 어떻게 긍휼해질 수가 있을까요? 첫째로 우리는 내가 긍휼함을 받은 사람이란 걸 깨닫고, 낮은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돈멀루라는 사람이 쓴 책, 「붐비는 우회로」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젊은 회사원이 부정한 방법으로 자기 회사의 자금 중 수천 달러를 몰래 빼돌렸습니다. 이 행위는 적발되었고, 젊은이는 사장실에 가서 그 경위를 보고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질 법적 조치가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당신의 행위가 모두 사실이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깜짝 놀랄 만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가 자네를 지금 그대로 일하게 해 준다면, 앞으로 자네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럽니다. 젊은이는 얼굴이 환해지면서 대답했습니다. “예, 사장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도 이 일로 인해 깨달은 바가 많습니다.” 그러자 사장이 말했습니다. “나는 자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네. 가서 일을 계속하게.” 그러면서 사장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어. 이 회사에서 유혹에 넘어갔다가 긍휼을 받은 사람은 자네가 두 번째 사람이야. 첫 번째 사람은 바로 나야. 나도 자네와 같은 짓을 했었지. 자네가 받고 있는 긍휼을 나도 받았다네.”
   내가 긍휼을 받은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긍휼을 베풀 주체로, 긍휼을 베풀 것인지 말 것이지, 선택하는 주체가 되기 전에, 우리는 긍휼을 이미 받은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당함으로써 용서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내가 긍휼하지 못하고, 강팍하고 분노가 나올 때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나도 긍휼을 받았지.” 이 마음이 되어야 해요. 그래서 언제나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긍휼을 베풀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가 긍휼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처지가 되어봐야 합니다. 역지사지의 마음이죠. 그러면 상대방이 다 이해되고, 그리고 불쌍하게 여겨지고, 자신의 차가웠던 가슴에 따뜻한 마음이 생기고, 용서할 수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사람을 살리고 싶어집니다. 상대방의 처지가 되어보면요,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입장이 되면 자연스럽게 긍휼해지는 것입니다.
   이해인수녀가 지은 책, “꽃이 지고나면 잎이 보이듯이”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강도가 어느 집에 들어갔습니다. 집 주인을 보고는 ‘손들어’ 했는데, 손을 안 들더래요. 그래서 ‘왜 안드냐’고 다그치니까, 집주인이 ‘오십견이라 못 든다’고 했다고 합니다. 마침 강도도 오십견이었던 터라, 둘이 앉아 오십견 이야기만 하다가, 강도질도 못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며칠 후 강도가 전화를 해와서, 오십견치료를 잘 하는 데가 있다고 함께 치료를 받으러 가자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같이 갔는데, 치료를 잘 받고, 치료비는 강도가 냈다고 합니다. 상대의 입장이 되고, 상대의 아픔을 이해하면, 내가 사랑을 주고 싶은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면, 그것이 공감인데요, 공감하면 따뜻해지고, 도와주고 싶어집니다.  
   가진 것이 많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픈 것이 다 있습니다. 아파서 힘들어 하는 것이 다 있어요. 어느 가정이든지요. 인생사 비슷한 거예요. 한 꺼풀 벗겨보면, 다 똑같이 아프고, 힘들게 짊어지고, 괴로워하는 문제들이 다 있는 거예요. 그것을 알고 그 사람을 보면, 긍휼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긍휼해지지 않을 때는, 역지사지로 상대방의 처지가 되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긍휼한 열매를 맺을 줄로 믿습니다.

이웃에게도 긍휼하라
   또 우리는 나보다 가진 것이 적은 이웃에 대해서 늘 긍휼한 마음으로 도와줘야 합니다. 소외된 이웃을 긍휼의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에게 행한 선행이 바로 예수님 자신에게 행한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뉴욕에는 공항이 두 개 있습니다. 케네디 공항 외에 라구아디아 공항이 있습니다. 본래 이 라구아디아라는 이름은 뉴욕시장의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을 따서 공항이름을 지은 건데요, 그는 아주 뉴욕시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인물이었던 거죠. 라구아디아는 시장이 되기 전에 아주 유명한 판사였습니다. 추운 겨울날 한번은 라구아디아 판사가 재판석상에서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노인은 추운 겨울에 가족들 없이 외롭게 사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돈도 없고, 너무나 배고픈 나머지 20달러를 훔치다가 체포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판결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판사가 그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어르신,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이 노인은 라구아디아 판사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판사님, 저에게 한번만 긍휼을 베풀어주십시오.” 잠시 동안 그 노인을 조용히 바라보던 판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맞습니다. 어르신에게는 정말 긍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노인은 자기가 잘못한 20달러에 대해서는 분명히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마침 제게 10달러가 있군요. 제가 이 10달러를 노인을 대신하여 변상하겠습니다. 노인을 춥고 배고프도록 내버려둔 데에는 저의 책임도 상당히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0달러가 더 필요한데 여기 법정에 계신 여러분, 여러분들도 이 노인이 춥고 배고파 방황하도록 그리고 도둑질하도록 버려 둔 데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기부를 좀 해 주세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이 재판관의 판결을 보고, 감동하여 자발적으로 기부하여 노인을 구했습니다. 그는 공적으로는 죄를 온전히 물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그는 긍휼을 선택했습니다. 그런 긍휼이 많은 판결을 한 그 판사는 후일에 뉴욕시장이 된 것입니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소외된 이웃을 보면 너그러워지고 긍휼한 마음이 언제나 드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에 따라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긍휼의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하루하루 더 긍휼해지셔서 천국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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