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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희년교회

희년(禧年·The Jubilee)은 50년만에 잃었던 땅을 되찾고 노예가 풀려나는 은혜의 해입니다(레위기 25장).
안식·해방·복권의 희년은 시공을 뛰어넘어 요청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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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작성자 : 운영자  /  등록일 : 2008.06.02 (14:08)  /  조회 : 1,467

  대한제국(1897~1910)의 처지는 망명정부보다 못했다. 국모가 일본 낭인의 칼에 목숨을 잃고 국왕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등 온갖 수모를 겪은 직후 등장했던 그야말로 이름뿐인 제국이었다.


  개항 이후 열강은 끊임없이 조선의 목줄을 죄어왔으며, 특히 일본은 국가의 사활을 걸고 제국을 공략했다. 1904년 조선은 재정, 군사 등 주요 정무를 일본에 위임했고 1905년엔 외교권마저 내놓아야 했다. 경제·재정·외교적으론 이미 일본의 속국이 됐다.


  대일 부채는 약 1300만원으로 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었다. 게다가 제국 신민들은 일본산 청주와 궐련 맛에 푹 빠져 대일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갔다. 재정, 교역 등에서 일본 의존은 날로 커졌다. 이게 1907년 제국의 현실이었다.


  바로 그 때 1907년 1월13일 밤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대대적인 회개·각성 운동이 벌어졌다. 새해 첫 주일인 6일 저녁부터 시작된 사경회가 8일째를 맞아 마무리되려는 순간 극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횡령, 사기, 축첩, 사취, 간음 등 집회 참가자들의 죄책 고백이 끝없이 이어졌고 변화의 역사는 삽시간에 한반도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이전부터 지엽적으로 벌어졌던 회개기도회가 마침내 열매를 맺은 덕분이었다.


  개개인의 고백과 각성으로 시작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열매는 사회윤리 실천, 국가적 각성운동으로 나타났다. 우선 1907년 2월부터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도 그 중 하나다. 금연, 금주가 선포되고 사람들은 각종 패물을 모아 대일 부채를 상환하자는 애국운동을 펼쳤다.


  또 그해 4월 결성된 비밀결사 신민회도 빼놓을 수 없다. 신민회는 회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으며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해산됐다. 이 둘 다 기독교가 애국운동과 깊이 연계됐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1907년은 기독교인들이 회개와 각성을 꾀하고 폐망을 앞둔 조국에 새 바람을 불어넣은 해였다.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 기독교의 입지는 어떤가. 기독교인들은 다시 회개하고 각성해 회개의 열매를 사회 앞에 펼쳐보여야 할 때다.

 

2007년 1월 17일 조용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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