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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희년교회

희년(禧年·The Jubilee)은 50년만에 잃었던 땅을 되찾고 노예가 풀려나는 은혜의 해입니다(레위기 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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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을 光州에 묻어두지 말라

작성자 : 운영자  /  등록일 : 2008.06.02 (13:25)  /  조회 : 1,622

  “아우슈비츠사건 이후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인 짓이다.” 독일의 비판이론가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정권을 비판하면서 그렇게 썼다. 진보로 치장된 인류역사의 실상이 얼마나 반인간적인가를 상징하는 말이다. 그 무시무시한 학살을 경험한 인류에게 문학과 예술은 의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아도르노의 주장은 타당하다.


  마찬가지로 지난 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반인륜적 참상 앞에서 민주전사시인 고(故) 김남주는 이렇게 절규했다.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서정적으로 오지는 않았다…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을/바람에 지는 풀잎으로/󰡐바람󰡑은 학살의 야만과 야수의 발톱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을…”


  오늘 ‘5·18 광주민중항쟁’ 스무 돌을 맞는다. 사망자 154명, 행방불명자 46명, 부상 후 사망자 82명. 지난 97년 5월 광주시가 공식 집계한 5·18관련 사망·행불자 수이다. 죽임이 득실거렸던 그해 5월이 지나고 시는 빛이 바랬고 노래는 가락을 잃었다. 신군부의 서슬 퍼렇던 80년대 초에는 그 누구도 5월 광주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도르노는 역사적 종말과도 같은 인류역사의 참담함과 그러한 역사를 지배했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경종을 울리는 데는 성공했다. 다만 그 비극적 사건이 역사의 종말로서만 이해되는 한,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은 ‘우울한 과학’, ‘비관적 형이상학’에 지나지 않다는 또 다른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죽음 가운데서도 생명은 다시 피어나는 것을 우리는 보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80년 5월 광주에 처박혀 죽임을 당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고 두 번 다시 시는 씌어지지 않을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민주주의는 87년 ‘6월항쟁’으로 부활한다. 어둠 속에서도 우리의 80년대는 새로운 빛을 잉태하고 있었던 셈이다. 다만 6월항쟁의 기쁨은 길지 못했다. 민주세력은 그토록 갈망하던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했지만 정작 선거에서는 신군부 출신에 밀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한번 씌어지기 시작한 시는 시간을 두고 계속해서 등장했다. 88년 정부는 정권차원에서 광주문제의 부분적 해결을 모색한다. 관변단체인 ‘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급조하고 5·18기념사업 추진도 거론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진실규명이 아니라 오히려 5·18을 희석시키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이로써 적어도 5월을 추모하는 일은 공개적으로 가능하게 됐다.


  광주민중항쟁이 이 땅에 시민권을 얻은 것은 문민정부에 들어와서였다. 문민정부는 3당 합당이라는 신군부 세력과의 야합에 의해 등장한 태생적 한계가 있었음에도 ‘진상규명과 학살자 처벌’이라는 광주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본질적 요구를 피해갈 수 없었다. 95년에는 5·18기념재단이 만들어지고 급기야 97년에는 5·18이 법정기념일로 됨으로써 5월 광주는 ‘폭동’의 오명을 벗고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자리매김된다.
 

 문제는 그 즈음부터 광주민중항쟁의 의미에 대한 풍화(風化)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5월 광주의 진실이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의미 깊은 일이지만 80년 5월의 진정한 의미가 기념행사에 의해 혹 가려지지나 않을지, 또 광주 망월동의 5·18기념묘지는 성역화되어 참배객들이 줄을 잇지만 이 때문에 5월 광주의 참 뜻이 광주라는 지역에 공간적으로 매몰되지나 않을지 우려된다.


  5월 광주는 사망자의 유가족들의 것도 아니고 부상자들의 가족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광주시민만의 것은 더더욱 아니다.5월 광주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요 조국의 몫이다. 때문에 5월을 광주에만 묻어둘 수만은 없다. 역사적 장소의 보존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된다면 또다시 5월 광주의 시와 노래는 빛을 잃게 될 것이다.
 

5월의 뭇 죽음이 우리 모두에게 부담으로 부활하여 있을 때 패역의 역사는 비로소 소생의 길을 찾게 된다. 이제 5월 광주는 지역갈등을 털어 낼 수단으로, 통일을 준비하는 시험장으로 떠올라야 한다. 정녕 우리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시를 쓸 수 있을까. 아도르노와는 달리 부활을 노래하는 시를, 우리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시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고/…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햐얀 길/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김남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2000년 5월 18일 조용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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