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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희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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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세기 첫 부활절을 기다리며

작성자 : 운영자  /  등록일 : 2008.06.02 (13:35)  /  조회 : 1,535

  얼마 전 영국의 BBC는 신약시대의 유태인 두개골을 근거로 첨단 법의학 기술을 동원하여 2000년 전의 예수 얼굴을 복원해 냈다. 그러나 도하 신문에 일제히 게재된 그 복원사진은 우리를 적지 않게 놀라게 했다. 지금까지 묘사되어온 예수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뭉뚝한 코에 부리부리한 눈, 제멋대로 삐진 거무튀튀한 머리칼과 몽당 수염, 인자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좁은 이마. 햇볕에 그을린 하층 노동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갸름하고 창백한 얼굴에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 시원한 이마, 금발의 부드러운 머릿결, 덕스럽게 길게 늘어뜨린 수염 등으로 묘사돼온 성화(聖畵) 속의 예수는 결코 아니었다.


  성서의 예수는 시종 자신을 ‘사람의 아들(인자·人子)’이라고 지칭했던 만큼 예수의 모습이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졌음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니 거꾸로 BBC의 복원작업이 하나의 예시에 불과한 것이기에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필요조차도 없다. 사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외모가 아니라 그의 가르침이 아니던가.


  문제는 우리가 본질보다는 겉모양에 치우쳐 살아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성향은 예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기독교가 흔히 ‘부활의 종교’로서 각인되어 있지만 부활과 고난은 같은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아서 고난을 따로 떼어놓고 부활을 거론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신약성서의 절반 가량을 기록한 사도 바울의 경우는 십자가의 의미에 더 초점을 두면서 자신은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했다”(고린도전서 2,2)면서 고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활만을 칭송하는 데 익숙해져 있을 뿐 아니라 고난은 잠깐이라며 그 의미를 폄하하고 눈여겨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고난을 상징하는 ‘십자가’조차 화려하게 치장을 하려고 드는 판국이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결과중심의 섣부른 낙관주의가 팽만해 있다. 부활은 성공과 축복의 이미지와 등치되어 우리에게 다가오고, 아니 강요되고 있다. 거꾸로 고난의 참 의미가 사라진 삶의 현장에서는 고난이 곧 죄로 둔갑하고 적시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만다.


  지난 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우리는 극도의 고난에 직면했다. 무수한 기업들이 도산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명퇴다 구조조정이다 하는 명목으로 일자리를 잃었다. 지난 30여 년간 압축성장의 이면에 숨어있던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온 것이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도처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로써 우리사회는 총체적인 개혁을 이뤄가자는 사회적 합의에 이르렀다.


  4대 부문에 대한 개혁과제가 등장했고 그에 따라 대부분의 국민들은 개혁을 위해서라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세금부담도 감수할 용의가 있었고 실업의 아픔과 급여삭감까지도 견뎌야 한다고 스스로를 독려해왔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여가 지난 지금 과연 무엇이 달라졌는가. 반복적인 위기론은 끊이지 않고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실업자수는 다시 100만 명을 넘어섰으며 올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4%대로 낮춰지고 있다.


  정책당국자들은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세계경제가 위축되고 있어 그렇다고 변명하기 바쁘지만 사실은 섣부른 개혁 낙관주의가 빚어낸 사태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낡은 틀을 새롭게 바꾸자는 개혁은 마치 낡은 틀로 인해 빚어지고 있는 사회적 고통(고난)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도 같다. 때문에 진득한 개혁을 꾀하기보다는 개혁 이후의 화려한 결과만을 좇는 태도는 마치 고난 없는 부활만을 강조하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고난을, 개혁의 고통을 달가워 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지금의 고통이 앞으로의 평안을 잉태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참고 견디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가치관이 지금처럼 부활에만 집중되어 있다면 우리 사회의 개혁은 지지부진을 면치 못할 게 분명하다. 고난의 아픔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되레 폄하하는 이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개혁의 고통을 감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 없는 개혁이 성공하지 못할 것은 십자가 없는 부활이 무의미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21세기 첫 부활절을 맞는 우리에게 과연 고난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번 고난주간 중에는 적어도 겉모양에만 집착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침잠 가운데서 나와 내 가족을, 내가 몸담은 일터와 이 사회를 진득하게 되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01년 4월 12일 조용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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