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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시대의 기독교인의 세상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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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운영자  /  등록일 : 2008.04.29 (15:58)  /  조회 : 1,189

 

소외시대의 기독교인의 세상살림(SAL19-HOME)

 

1998년 5월 24일(주일 대예배. 마태복음 10, 34~39)

 

“(34)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가 검을 주려고 왔다. (35)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그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그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식구일 것이다[미가서 7, 6]. (37)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합당하지 않다.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 (39)자기 목숨을 얻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소외시대의 징후들

 

오늘의 주제는 소외문제 그리고 기독교인의 세상살림입니다. 그러면 우선 소외에 대해서 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소외란 무엇입니까? 순수한 우리말식으로 표현하면 따돌림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따돌림은 나쁜 뜻으로 사용됩니다. 부정적 표현입니다. 요즈음 초중고등고생을 자녀로 둔 부모들은 혹시나 자기 자식이 친구로부터 따돌림이나 받지 않을까 노심초사합니다. 무의탁 노인, 전철안에 무수히 등장하는 구걸하는 사람들(물론 그들 중에는 앵벌이로 강요당한 사람도 있습니다)이 경험하는 사회(또는 사회조직)로부터의 따돌림도 있습니다. 또한 가출한 부모 때문에 고아원에 맡겨진 아이들처럼 부모로부터의 따돌림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나이든 부모가 하는 자식으로부터 따돌림당하여 외롭게 노후를 보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는 소외는 그러나 사람이나 사회조직으로부터 받는 따돌림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소외, 즉 따돌림에 대해서 좀더 넓게 생각해 보면 그 내용은 매우 다양합니다.

19세기 독일의 자연철학자 루드비히 폰 포이에르바하(헤겔과 마르크스의 사상적 연결고리를 제공)는 중세의 교회가 갖는 권위와 그 권위에 복종되어 있는 문제를 ‘인간의 소외’를 처음으로 지적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소외를 설명합니다.

아주 먼 원시시대에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 많았습니다. 오늘날 극히 상식적인 자연현상에 대해서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알지못하는 모든 현상, 즉 자연현상에서 생로병사 등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하나의 신으로 종교로 숭배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원시인 부자가 저녁을 먹고 배를 두드리면서 동산에 나란히 누었다고 합시다. 모든 것에 호기심이 충만한 원시인 아이는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는 지금 몇살이야?

=42살.

사냥도 많이 해봤지?

=그럼, 너도 커서 아버지처럼 씩씩하게 사냥을 해야지.

그럼 아빠는 사냥하러 높은 산에도 가봤겠네?

= 그럼. 저기 보이는 높은 산도 가봤지.

저기 반짝이는 별에도 가봤어?= 아니. 황당한 아버지.

그런데 별은 왜 반짝여?

= …

낮에는 왜 안보이여?

= …. 쓸데 없는 그만 두고 둬라. 그걸 알아서 뭘하니?

그 사이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근데 바람은 어디서 불어?

= 저 언덕 큰 동굴에서부터 넘어서 불지.

왜 불어?

=… 어. 글쎄, 쓸데없는 소리 말랬지? 잔소리 그만하고 어서 자.

드디어 원시인 아버지는 아들을 윽박지르고 맙니다.

(최근에 현모가 이렇습니다, 윽박지르지는 않으려고 애를 쓰고는 있습니다만)

 

아들을 돌려보내 놓고 아버지는 곰곰히 생각합니다. 그래 왜 바람은 불까? 별은 낮에 다 어디 가 있는걸까? 알길이 없습니다. 결국 그 과정에서 종교가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것은 신의 영역으로 두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포이에르바하는 종교나 신이 인간의 무지를 통채로 담아둘 배출구로서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즉 인간의 필요에 의해 탄생한 것이 종교였다는 것이죠. 그런데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가 이후에 점점 비대해지면서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는 소외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저나 여러분이나 포이에르바하의 종교관에는 동의할 생각이 전혀 없겠습니다만, 적어도 그가 지적한 ‘소외에 대한 인식’은 ‘소외문제’를 인식하는데 매우 중요한 틀이 됩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거꾸로 엑스트라가 되어 주체자가 아닌 종속자가 되는 것을 소외로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따돌림은 주체자라는 인식이 없습니다. 다분히 주관적입니다. 단지 자신의 관점에서 따돌림의 아픔만을 부각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포이에르바하의 인식은 마르크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어 마르크스는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상품경제하에서의 인간의 소외를 지적하였습니다. 즉 상품을 만든 주체자는 사람인데 시장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시장경제체제 하에서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오로지 상품관계만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또한 제품을 만든 것은 노동자인데도 그가 만든 제품의 소유주는 그를 고용한 기업가라는 사실에 또 다시 소외가 발생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상품경제자체가 만들어논 경제적인 소외이며, 또한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의 계급적 소외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상대적 박탈감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바로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130여년 전에 마르크스가 제기한 소외문제에서 우리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소외의 한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국가는 이러한 소외에서 예외는 없습니다. 다만 선진국의 경우는 이러한 소외를 국가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사회보장제도를 튼튼히 한다든가, 다양한 문화적 욕구충족을 통하여 소외를 완화시키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소외문제, 즉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하려는 여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상대적 박탈감 측면에서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요? 단기간 내에 경제성장을 이루었기에 사회보장제도며, 문화적 해소출구도 매우 부족합니다. 따라서 마르크스식 소외문제는 매우 심각한 지경이었습니다.(예를들어 한국에서는 ‘부자가 존경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대학생들의 설문조사에는 파라소닉의 마츠시타, 소니의 모리타, 혼다자동차의 혼다를 지적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마르크스식 소외문제는 심각했지만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발판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첫째로 사회전체적으로 빈부격차가 심화되거나 상대적 박탈감이 심화되었어도 전체적인 양적성장이 계속되면서 가난한 자도 일정정도의 경제적 윤택함을 얻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둘째로 가족공동체의 존재였습니다. 가족은 마치 스폰지와 같아서 밖에서 겪는 소외감과 상태적 박탈감을 모두모두 흡수해 주었습니다. 이는 구미각국에 비하여 현저하게 낮은 이혼율 등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간 한국의 가족은 급격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도 소외의 폭풍우를 막아주는 방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것은 성장과 물질에 대한 신봉주의와 가족이기주의입니다. 경제적 성장과 가족의 둥우리(가정)가 소외의 외풍으로부터 막아주는 구실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또다시 문제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제위기와 가정의 위기 : 가정과 사회로부터의 소외

더구나 최근 벌어지고 있는 외환위기, 경제위기는 소외의 첫 번째 방벽이었던 성장과 물적이익을 앗아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는 또다시 두 번째 방벽이었던 가족의 붕괴를 조장시키기까지 합니다. 서울역을 비롯하여 지하철 역에 갈수록 늘어만 가는 홈리스들의 문제는 우리의 소외문제가 이제 매우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렀음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이 경제위기의 근본은 사실 성장과 물적 신봉주의가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이었습니다. 배삼룡과 구봉서의 웃으면 복이와요(군고구마장수와 붕어빵장수의 역설입니다).

본래부터 가정 혹은 가족의 붕괴문제는 자본주의가 발전되면 될수록 심화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보통입니다. 상품경제관계가 가정에 침입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들어 우리는 재산 때문에 부모를 죽인 사건을 자주 접하고 있습니다. 서경대경제학과 교수였던 사람, 어는 유학생의 방화사건 등등. 이미 가정의 붕괴는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두 방벽도 사실은 소외문제를 약간 연기한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경제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음기회에 미루기로 하고 주로 가정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날 가족의 문제는 가족이기주의와 가족(가정)의 붕괴라고 하는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가족이기주의는 지난주에 박영주준목께서 설교중에 말씀하신 바대로 놀이동산에서 부모가 자기자식을 위해 대신 줄서주는 것이 아주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가족이기주의가 매우 주관적이며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는 특징을 지니며, 성장과 물질신봉주의와 강하게 결합되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자식에 대한 애정에서 표출되는 것은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 속에는 성장과 물질신봉주의적 배경이 있습니다. 공부잘해서, 좋은 곳에 취직하고, 부를 쟁취해야 한다는 도식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요령이 필요할 뿐 타인에 대한 배려나 상식은 고려대상이 아닙니다. 그 결과 만들어지는 것은 이기적인 인간양산뿐입니다.

제가 경험한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한국경제사시간. 그룹발표. 4명씩. “누구누구는 전혀 발표에 기여하지 않았다”며 난색을 표하는 학생들이 있음. 취직과 성적은 불가불관계=학생들의 에고이즘. 대단합니다. 놀랐음. 해결방법을 강구하느라고 고심했습니다. 평가자료로.

내 자식에 대한 열정은 누구나 다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은 도를 넘고 있는 셈입니다. 극단적인 가족해체상황과, 가족이기주의의 만연으로 더 이상 건전성을 상실한 가정은 탐욕적 사회에 대비하는 예비군을 양성하는 곳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가족이기주의에서는 자녀에 대해 오로지 한가지 기준만을 적용합니다. 공부잘하는 것. 이 문제만 해결되면, 대학에만 들어가면 하는 식입니다. 공부와 관련된 문제라고 판단되면 부모는 자녀에게 철저하게 관대합니다. “에이 공부하는데~”,

가정은 자녀에게 사랑과 총체적인 교육의 공간이어야 합니다. 한가지 기준으로 만사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 부모들의 이러한 태도가 자녀를 요령주의, 결과주의, 성장 및 물질주의로 내몰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란 아니들은 타인에 대한 소외문제를 낳습니다.

앞에서 소외를 따돌림으로 이야기 했습니다만, 마치 지금의 가족이기주의는 따돌림당하지 않으려고 발버둘치면서 따돌림할 것을 주입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이는 소외를 양산하게 될 것이고 스스로 소외의 올무에 걸리고 맙니다. 공부잘하는 자, 일류대학에 가는 자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노력을 하지만 그 기준으로만 생각할 때 성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공부로부터 소외되고, 일류대학에 소외되고, 물질로부터 소외되고 맙니다. 그들은 스스로 소외를 양산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소외의 올무에 빠져들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한국의 위기는 “일등만을 기업합니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는 광고와 같은 생각이 빚어낸 것입니다.

가정은 이제 붕괴되고 있으며, 가정은 소외를 극복해줄 대안이 아니라 오히려 소외를 조장시키며 스스로 소외(따돌림)의 나락으로 들어가는 전진기지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기독교의 종말론적 세계관

 

이러한 문제를 염두에 두고 오늘의 성경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오늘 읽은 성서본문에서 예수님은 매우 무시무시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가족의 구성원들이 서로 싸우며 만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35아들이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그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그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36절에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식구라고 까지 말슴하십니다. 이야말로 가족붕괴, 가정파멸의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땅에 오심을 검을 주로 왔노라고 하십니다. 또한 누가복음 12장 51절에서는 불을 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의 가정파멸을 예언이라도 하신 듯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의 사명을 띠고 세상으로 내보내시면서 훈계말씀을 하시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로 인하여 가족붕괴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에 온정성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가족이기주의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습니다. 37절에 “나보다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합당하지 않으며, 나보다도 아들이나 딸을 사랑하는 사람도 합당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가족관계는 구약시대 이래로 하나님의 분깃을 댜대로 물려받는 주체였습니다. 그만큼 가족관계(가문)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가족이기주의적 행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타파되어야 한다는 주장인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누가복음에서 더욱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 49~53 :

“49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기를 내가 얼마나 원했던고!”, “51. ~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1)바로 그 직전에, “~목숨을 위하여 무얼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얼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있다. ~ 그러므로 너희는 그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12장 22절). 이하 깨어있을 것을 명함(35절 이하,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두라~).

2)그 다음 귀절에는 “때를 분간하라”(54절).

 

즉 지금은 가족이기주의나 온정주의에 빠져 단잠을 잘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족이기주의는 앞서도 말씀드린대로 성장과 물질신봉주의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때문에 나타난 것이 바로 가족이기주의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맹목적인 문제에 근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목숨을 위하여 무얼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얼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있다. ~ 그러므로 너희는 그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누가복음 12장 22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장과 물질신봉주의는 이쯤에서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스스로가 가족이기주의에 감염되어 있기에 우리는 쉽게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자녀의 성적에 대해서 걱정하실 것입니다. 자녀의 장래에 대해서 거정하실 것입니다. 또한 남편의 직장에 대해서도 노심초사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자녀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자녀의 성적문제만큼 걱정하십니까? 자녀의 장래만큼 댁의 자녀가 남에게 소외를 주는 생활태도에 대해서 걱정하십니까? 남편의 해고문제만큼, 부인의 건강문제만큼 상대의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에 대해서 걱정하십니까?

우리는 쉽게 ‘그렇다’고 답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스스로가 성장과 물질 신봉주의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한계적 상황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매우 조급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서본문이 주장하는 것은 그러한 조급함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점은 역사인식에 있습니다. 그 역사는 앞날이 창창하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과 같은 광대하고 화려한 역사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렸으며, 죽임을 당하였고 고통뿐인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죽음에서 다시 시작된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가 화려하고 넓은 길을 달리는 것과 같은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한결같이 부패와 나락이 계속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중세카톨릭의 역사가 바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고통중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학자들은 기독교의 종말론적 역사관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그 역사를 걷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그러면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딥니까? 바로 그 때문에 교회공동체가 있는 것입니다. 홀로 서기 어려운 우리 한사란 한사람을 함께 붙들고 함께 나갈 수 있는 힘을 더해주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또 한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가정의 본래적 회복문제입니다. 오늘 성서본문에서는 가정의 파괴를 선언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가족의 문제입니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하나님과 친화적인 가정,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가정을 전제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그러한 가정을 꾸리도록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친화적인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도 교회공동체와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인의 세상살림이 지향하는 의미가 가정과 교회의 연결고리가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세상살림과 가정

 

말이 난김에 세상살림예배에 대해 광고차원에서 자랑을 좀 하겠습니다.

장황하지 않게. 1)이 시대의 많은 문제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2)특히 한국의 경제적 위기에 대해서 누차 강조함으로써 예측성이 높은 정보가 교환되었다는 점. 3)통일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계속 유지해오고 있다는 점.

이러한 내용을 정리해보면서 사실 저는 심한 두려움과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예배가 지속되고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다만 교인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저는 많은 어려움에 봉착해 있는 우리들 자신들의 문제를 여러분께 내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문제를 전부 수용해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홀로가 아닌 교회공동체의 연대와 지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당시께 철저히 맡기고 의지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 영역이 교회 내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고백해야 합니다. 이때 기독교인의 세상살림이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며 우리의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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