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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희년교회

희년(禧年·The Jubilee)은 50년만에 잃었던 땅을 되찾고 노예가 풀려나는 은혜의 해입니다(레위기 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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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타쿠미

작성자 : 운영자  /  등록일 : 2008.06.02 (14:03)  /  조회 : 1,758

  추석 연휴는 끝났다. 몇 해 전부터 명절 귀성은 피하기로 해 이번에도 귀성대열엔 동참하지 않았다. 덕분에 밀린 잠도 보충하고, 여유 작작 책을 읽는 호사도 누렸다.


  그 중에서도 얼마전 일본인 친구가 보내온 책 두 권이 특히 마음에 남는다. 둘 다 현재 서울 망우동 공원묘지에 잠들어 있는 아사카와 타쿠미(淺川巧,1891~1931)에 대한 것이다. 에미야 타카유키의 소설 ‘백자(白磁)의 사람(1994)’과 스기무라 아야의 연구보고서 ‘일·한 교류의 선구-아사카와 타쿠미(2004)’.


  아사카와에 대해서는 다카사키 소지의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아사카와 타쿠미의 생애(1982)’를 바탕으로 이미 본란(98년 8월 31일자 ‘8월을 보내며’)에 소개한 바 있다. ‘조선의 미’를 극찬한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조선 백자의 멋과 전통공예품의 맛을 일깨워 준 아사카와. 조선과 조선인을 사랑했고, 유창한 한국말과 더불어 바지저고리를 즐겨 입었던 그.


  그는 1914년부터 17년 간 총독부 농공상부 삼림과 임업시험장 기사로 일하면서 조선의 서민예술을 사랑하다가 급성폐렴으로 쓰러져 이 땅에 묻혔다. 감리교 신자였던 그는 식민지 지배·피지배 관계를 뛰어넘는 보편적 인간애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고 몸소 실천했다.


  그의 급사 소식에 사방에서 조선인들이 몰려와 그의 관을 서로 메겠다고 했을 정도라니. 지금도 망우동에는 그를 기리는 한국인·일본인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첫 연구서(1929)인 ‘조선의 밥상(膳)’ 마지막 대목만큼 그의 진의를 잘 드러낸 것은 없다.


  “피곤한 조선이여, 다른 사람을 흉내내기보다 체득하고 있는 것을 잘 간직한다면 언젠가는 자신감 넘칠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은 단지 공예의 길만이 아니다.” 이 문구에 대해 소설 ‘백자의 사람’은, 당시 아사카와를 흠모했던 경성제대의 아베 요시시게 교수는 총독부가 아사카와를 반일 사상범으로 문제삼을까봐 전전긍긍했다고 전한다.


  이웃나라에 대한 일본의 오만함은 여전하지만 한편으론 아사카와를 닮겠다는 일본인들이 늘고 있다.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예컨대 앞서 소개한 책의 저자 스기무라는 겨우 고교 1년생. 그 책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의 숙제물을 다듬은 것이란다. 마치 한·일 관계의 새 희망을 보는 듯하다.


  대립 극복은 이웃 문화, 이웃 사람에 대한 존중과 공감에서 시작된다. 추석은 지났지만 이번 주말에는 망우동에라도 다녀올까 보다.

 

2004년 9월 30일 조용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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