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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희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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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이야기

작성자 : 운영자  /  등록일 : 2008.06.02 (13:45)  /  조회 : 1,582

  “수치를 당하기 전에 죽자/ 수류탄을 달라/ 낫으로, 곡괭이로, 면도날로 해치워라/ 부모는 자식을, 남편은 아내를, 젊은이는 늙은이를/ 에메랄드 바다는 핏빛으로 변하고/ 집단자결이란 손을 대지 않고 행하는 학살이다”


  지난달 말, 일본교계의 지인들이 오키나와 본토반환 30주년을 한 해 앞두고 오키나와가 갖는 현대사적 의미를 되씹어보기 위해 기획한 오키나와 역사탐방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출발 전엔 에메랄드빛 상하(常夏)의 바다로 떠난다는 생각에 수학여행 전야처럼 들떴지만 도착하고부터는 시종 마음이 무거웠다. 앞서 인용한 글귀와 같은 오키나와전(戰)의 상흔을 좇는 가운데 남국의 정취도 이국적인 현란함도 이미 뇌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 글귀는 사키마미술관의 제3전시실에 걸린 일본의 대표적인 반전 작가 마루키 토시(1913~2000)의 ‘오키나와전의 그림’(400×850cm, 1984년작)에서 발견했다. 이 그림은 마루키가 오키나와전을 소재로 한 총 14편의 연작 중 하나다. 작가가 직접 써넣었다고 하는 그 글귀도 그렇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대형 화폭에 담은 집단자결의 메시지는 전율 바로 그것이었다.


  오키나와전은 1945년 4월1일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과 오키나와 방위부대인 일본제국 32군 사이에 석 달간에 걸쳐 벌어진 지상전을 말한다. 대부분의 전쟁이 그렇지만 오키나와전 만큼 민간인의 희생이 큰 전쟁은 없었다. 그것은 열악한 군세(軍勢)의 32군이 지상병력만 18만 명에 해군 및 후방보급부대를 포함하면 총 54만 명에 이르는 미군을 맞아 싸워야 했기 때문은 아니다.


  문제는 오키나와전에 대한 당시 일본제국 수뇌부의 인식이었다. 일본은 당시 본토방어를 위한 시간 벌기 차원에서 오키나와를 선택하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도 싸우도록 독려했다. 그 와중에 수많은 주민들은 ‘가마’(천연종유동굴)에 숨어 지내다가 자국군대의 총칼에 죽는, 그리고 형제자매·부모자식·부부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을 겪었던 것이다.


  당시 주민의 3분의 1가량인 12만 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 본토방어의 목적이 다름 아닌 국체호지(國體護持), 즉 천황제의 유지·보호에 있었다니 분통이 터진다. 지배 권력의 존립을 위해 철저히 유린된 민초들의 아픔을 오키나와에서 만난다. 동시에 이 문제를 일본정부가 철저히 인식하지 않으면 일본의 역사왜곡과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에서 오키나와 민중들과의 연대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사실 오키나와는 철저히 버려진 섬이었다. 전쟁 때는 물론이고 패전 후 지금까지도. 일본은 점령국 미국의 눈치를 살피면서 오키나와를 미국의 별도 지배하에 놓는데 적극 동의했다. 냉전이 시작되던 당시 미국은 지리적인 군사요충지로서 오키나와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오키나와의 질곡은 전쟁이 끝나고서도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72년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 이후에도 그 사정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우리 한반도가 해방 이후 냉전체제로 인해 또 다시 분단이라고 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던 점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예컨대 사키마미술관 바로 옆에 있는 거대한 해병항공대(MCAS) ‘후텐마기지’의 경우를 보자. 후텐마기지는 기노완시(市)의 한 가운데 자리고 있으며 특히 면적(480ha)이 시 면적(1937ha)의 4분의 1에 육박하고 있어 주민들의 삶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거대한 공격용 헬기가 지척에서 뜨고 내리는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나라에도 도처에 널린 미군기지, 그로 인해 발생하는 민생의 불편, 잊혀 질 만하면 발생하는 미군범죄, 그리고 불평등한 한미주둔군 협정 등이 잇따라 떠올라 가슴이 저리는 것은 지나친 민감증 때문일까.


  20세기를 상징하는 말들은 여러 가지이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역시 전쟁이다. 19세기를 ‘혁명·자본·제국의 시대’로 자리 매김 했던 영국의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로 보았다. 일본의 와다 하루키도 20세기를 ‘세계전쟁의 시대’로 규정한 바 있다(‘역사로서의 사회주의’, 1992). 그런가 하면 원로사학자 강만길은 특히 우리나라의 20세기를 주저 없이 ‘한(恨)의 세기’로 특징짓는다.


  모두가 전쟁으로 빚어진 시대의 아픔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었지만 야만의 시대는 여전하다. 오키나와에서도, 한반도에서도,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중동에서도 죽음의 역사는 이어지고 있다. 그곳에 살아가는 민초들의 한은 언제나 풀릴까. 아니 지금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2001년 12월 06일 조용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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