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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희년교회 희년(禧年·The Jubilee)은 50년만에 잃었던 땅을 되찾고 노예가 풀려나는 은혜의 해입니다(레위기 25장). 안식·해방·복권의 희년은 시공을 뛰어넘어 요청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 희년 칼럼잠실희년교회에 오신걸 환경합니다. 제목 작성자이메일 홈주소 관련링크 공지등록 체크하면 게시글 상단에 고정 등록 됩니다. 글등록설정 체크하면 관리자에게만 이글이 공개됩니다 원문 : 1907년<P> 대한제국(1897~1910)의 처지는 망명정부보다 못했다. 국모가 일본 낭인의 칼에 목숨을 잃고 국왕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등 온갖 수모를 겪은 직후 등장했던 그야말로 이름뿐인 제국이었다.</P> <P><BR> 개항 이후 열강은 끊임없이 조선의 목줄을 죄어왔으며, 특히 일본은 국가의 사활을 걸고 제국을 공략했다. 1904년 조선은 재정, 군사 등 주요 정무를 일본에 위임했고 1905년엔 외교권마저 내놓아야 했다. 경제·재정·외교적으론 이미 일본의 속국이 됐다.</P> <P><BR> 대일 부채는 약 1300만원으로 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었다. 게다가 제국 신민들은 일본산 청주와 궐련 맛에 푹 빠져 대일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갔다. 재정, 교역 등에서 일본 의존은 날로 커졌다. 이게 1907년 제국의 현실이었다.</P> <P><BR> 바로 그 때 1907년 1월13일 밤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대대적인 회개·각성 운동이 벌어졌다. 새해 첫 주일인 6일 저녁부터 시작된 사경회가 8일째를 맞아 마무리되려는 순간 극적인 변화가 찾아왔다.</P> <P><BR> 횡령, 사기, 축첩, 사취, 간음 등 집회 참가자들의 죄책 고백이 끝없이 이어졌고 변화의 역사는 삽시간에 한반도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이전부터 지엽적으로 벌어졌던 회개기도회가 마침내 열매를 맺은 덕분이었다.</P> <P><BR> 개개인의 고백과 각성으로 시작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열매는 사회윤리 실천, 국가적 각성운동으로 나타났다. 우선 1907년 2월부터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도 그 중 하나다. 금연, 금주가 선포되고 사람들은 각종 패물을 모아 대일 부채를 상환하자는 애국운동을 펼쳤다.</P> <P><BR> 또 그해 4월 결성된 비밀결사 신민회도 빼놓을 수 없다. 신민회는 회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으며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해산됐다. 이 둘 다 기독교가 애국운동과 깊이 연계됐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BR> 1907년은 기독교인들이 회개와 각성을 꾀하고 폐망을 앞둔 조국에 새 바람을 불어넣은 해였다.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 기독교의 입지는 어떤가. 기독교인들은 다시 회개하고 각성해 회개의 열매를 사회 앞에 펼쳐보여야 할 때다. </P> <P>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2007년 1월 17일 조용래 논설위원</SPAN></P>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P>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P>RE : 1907년 글꼴 맑은고딕 굴림 바탕 궁서 돋움 Tahoma verdana 크기 8pt 9pt 12pt 14pt 18pt 24pt 36pt 원문 : 1907년<P> 대한제국(1897~1910)의 처지는 망명정부보다 못했다. 국모가 일본 낭인의 칼에 목숨을 잃고 국왕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등 온갖 수모를 겪은 직후 등장했던 그야말로 이름뿐인 제국이었다.</P> <P><BR> 개항 이후 열강은 끊임없이 조선의 목줄을 죄어왔으며, 특히 일본은 국가의 사활을 걸고 제국을 공략했다. 1904년 조선은 재정, 군사 등 주요 정무를 일본에 위임했고 1905년엔 외교권마저 내놓아야 했다. 경제·재정·외교적으론 이미 일본의 속국이 됐다.</P> <P><BR> 대일 부채는 약 1300만원으로 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었다. 게다가 제국 신민들은 일본산 청주와 궐련 맛에 푹 빠져 대일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갔다. 재정, 교역 등에서 일본 의존은 날로 커졌다. 이게 1907년 제국의 현실이었다.</P> <P><BR> 바로 그 때 1907년 1월13일 밤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대대적인 회개·각성 운동이 벌어졌다. 새해 첫 주일인 6일 저녁부터 시작된 사경회가 8일째를 맞아 마무리되려는 순간 극적인 변화가 찾아왔다.</P> <P><BR> 횡령, 사기, 축첩, 사취, 간음 등 집회 참가자들의 죄책 고백이 끝없이 이어졌고 변화의 역사는 삽시간에 한반도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이전부터 지엽적으로 벌어졌던 회개기도회가 마침내 열매를 맺은 덕분이었다.</P> <P><BR> 개개인의 고백과 각성으로 시작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열매는 사회윤리 실천, 국가적 각성운동으로 나타났다. 우선 1907년 2월부터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도 그 중 하나다. 금연, 금주가 선포되고 사람들은 각종 패물을 모아 대일 부채를 상환하자는 애국운동을 펼쳤다.</P> <P><BR> 또 그해 4월 결성된 비밀결사 신민회도 빼놓을 수 없다. 신민회는 회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으며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해산됐다. 이 둘 다 기독교가 애국운동과 깊이 연계됐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BR> 1907년은 기독교인들이 회개와 각성을 꾀하고 폐망을 앞둔 조국에 새 바람을 불어넣은 해였다.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 기독교의 입지는 어떤가. 기독교인들은 다시 회개하고 각성해 회개의 열매를 사회 앞에 펼쳐보여야 할 때다. </P> <P>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2007년 1월 17일 조용래 논설위원</SPAN></P>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P>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P>RE : 1907년 비밀번호 작성 뒤로 목록
제목 작성자이메일 홈주소 관련링크 공지등록 체크하면 게시글 상단에 고정 등록 됩니다. 글등록설정 체크하면 관리자에게만 이글이 공개됩니다 원문 : 1907년<P> 대한제국(1897~1910)의 처지는 망명정부보다 못했다. 국모가 일본 낭인의 칼에 목숨을 잃고 국왕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등 온갖 수모를 겪은 직후 등장했던 그야말로 이름뿐인 제국이었다.</P> <P><BR> 개항 이후 열강은 끊임없이 조선의 목줄을 죄어왔으며, 특히 일본은 국가의 사활을 걸고 제국을 공략했다. 1904년 조선은 재정, 군사 등 주요 정무를 일본에 위임했고 1905년엔 외교권마저 내놓아야 했다. 경제·재정·외교적으론 이미 일본의 속국이 됐다.</P> <P><BR> 대일 부채는 약 1300만원으로 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었다. 게다가 제국 신민들은 일본산 청주와 궐련 맛에 푹 빠져 대일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갔다. 재정, 교역 등에서 일본 의존은 날로 커졌다. 이게 1907년 제국의 현실이었다.</P> <P><BR> 바로 그 때 1907년 1월13일 밤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대대적인 회개·각성 운동이 벌어졌다. 새해 첫 주일인 6일 저녁부터 시작된 사경회가 8일째를 맞아 마무리되려는 순간 극적인 변화가 찾아왔다.</P> <P><BR> 횡령, 사기, 축첩, 사취, 간음 등 집회 참가자들의 죄책 고백이 끝없이 이어졌고 변화의 역사는 삽시간에 한반도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이전부터 지엽적으로 벌어졌던 회개기도회가 마침내 열매를 맺은 덕분이었다.</P> <P><BR> 개개인의 고백과 각성으로 시작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열매는 사회윤리 실천, 국가적 각성운동으로 나타났다. 우선 1907년 2월부터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도 그 중 하나다. 금연, 금주가 선포되고 사람들은 각종 패물을 모아 대일 부채를 상환하자는 애국운동을 펼쳤다.</P> <P><BR> 또 그해 4월 결성된 비밀결사 신민회도 빼놓을 수 없다. 신민회는 회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으며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해산됐다. 이 둘 다 기독교가 애국운동과 깊이 연계됐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BR> 1907년은 기독교인들이 회개와 각성을 꾀하고 폐망을 앞둔 조국에 새 바람을 불어넣은 해였다.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 기독교의 입지는 어떤가. 기독교인들은 다시 회개하고 각성해 회개의 열매를 사회 앞에 펼쳐보여야 할 때다. </P> <P>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2007년 1월 17일 조용래 논설위원</SPAN></P>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P>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P>RE : 1907년 글꼴 맑은고딕 굴림 바탕 궁서 돋움 Tahoma verdana 크기 8pt 9pt 12pt 14pt 18pt 24pt 36pt 원문 : 1907년<P> 대한제국(1897~1910)의 처지는 망명정부보다 못했다. 국모가 일본 낭인의 칼에 목숨을 잃고 국왕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등 온갖 수모를 겪은 직후 등장했던 그야말로 이름뿐인 제국이었다.</P> <P><BR> 개항 이후 열강은 끊임없이 조선의 목줄을 죄어왔으며, 특히 일본은 국가의 사활을 걸고 제국을 공략했다. 1904년 조선은 재정, 군사 등 주요 정무를 일본에 위임했고 1905년엔 외교권마저 내놓아야 했다. 경제·재정·외교적으론 이미 일본의 속국이 됐다.</P> <P><BR> 대일 부채는 약 1300만원으로 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었다. 게다가 제국 신민들은 일본산 청주와 궐련 맛에 푹 빠져 대일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갔다. 재정, 교역 등에서 일본 의존은 날로 커졌다. 이게 1907년 제국의 현실이었다.</P> <P><BR> 바로 그 때 1907년 1월13일 밤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대대적인 회개·각성 운동이 벌어졌다. 새해 첫 주일인 6일 저녁부터 시작된 사경회가 8일째를 맞아 마무리되려는 순간 극적인 변화가 찾아왔다.</P> <P><BR> 횡령, 사기, 축첩, 사취, 간음 등 집회 참가자들의 죄책 고백이 끝없이 이어졌고 변화의 역사는 삽시간에 한반도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이전부터 지엽적으로 벌어졌던 회개기도회가 마침내 열매를 맺은 덕분이었다.</P> <P><BR> 개개인의 고백과 각성으로 시작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열매는 사회윤리 실천, 국가적 각성운동으로 나타났다. 우선 1907년 2월부터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도 그 중 하나다. 금연, 금주가 선포되고 사람들은 각종 패물을 모아 대일 부채를 상환하자는 애국운동을 펼쳤다.</P> <P><BR> 또 그해 4월 결성된 비밀결사 신민회도 빼놓을 수 없다. 신민회는 회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으며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해산됐다. 이 둘 다 기독교가 애국운동과 깊이 연계됐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BR> 1907년은 기독교인들이 회개와 각성을 꾀하고 폐망을 앞둔 조국에 새 바람을 불어넣은 해였다.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 기독교의 입지는 어떤가. 기독교인들은 다시 회개하고 각성해 회개의 열매를 사회 앞에 펼쳐보여야 할 때다. </P> <P>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2007년 1월 17일 조용래 논설위원</SPAN></P>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P>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P>RE : 1907년 비밀번호 작성 뒤로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