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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란다”고 했다. 하지만 ‘기왕 떠나는 마당에 사람이 풍류가 있어야지’ 하는 생각에 그렇게 다시 고쳐 적었다. 물론 서울생활에 대한 불만을 아들자식 내외에 조금 내보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이지 그간의 불만이며 맘 고생을 말로 다하자면 울컥증이 앞서 말을 잇기조차 어려울 것이다.</P> <P><BR> 몹쓸 병으로 고생하던 할머니를 5년 전 하늘나라로 먼저 보내고 홀로 지내면서도 평생을 살던 고향이며, 몇 푼 안 되는 농사지만 일이 있었기에 견딜 만 했다. 하지만 여든을 눈앞에 두고 해가 갈수록 혼자 해먹는 밥이 귀찮아지면서 외로움이 더해 갔다. 그래서 입버릇처럼 서울가서 함께 살자는 큰아들 말에 못이긴 척 따라나섰다. 그게 지난겨울이었다.</P> <P><BR> 아파트에 사는 아들 내외는 구석방 하나를 비워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저희 살기도 바쁜 세상에 아비를 배려하는 품이 가상하다는 생각도 들어 미안한 마음이 늘 떠나지 않았지만 친구도 없고 소일거리조차 없는 하루하루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함께 사는 아들네 가족들과는 제대로 된 교통이 없었다. 시골에 살 때는 그래도 안부전화라도 있었는데.</P> <P><BR> 뭐가 그리도 바쁜지 아범은 늘 귀가가 늦었고 며느리는 외출이 잦았다. 하나 있는 손자는 학원이다 과외다 하며 차분히 얼굴 볼 기회도 별로 없을 지경이었다. 1주일에 두 번 오는 파출부 아줌마가 그래도 말상대가 됐지만 냄새 나는 시골 노인네로 취급당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주먹만한 강아지조차 뒤로 실실 빼는 꼴이 도무지 정분이 안 가는 생활이었다.</P> <P><BR> 점차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방 바깥으로 나오는 일도 줄었다. 그러면서도 방문 바깥에 늘 귀를 쫑긋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우두커니 방안에 앉아 이 집 식구들 가운데 자신의 위치는 과연 어느 정도인가를 고민하게 된 것도 그쯤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이 집 식구들의 중요도로 메긴 우선 순위가 보이기 시작했다.</P> <P><BR>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1번은 아들자식이 아니라 며느리였다. 손자의 교육문제을 비롯해 경제권 행사, 집안 대소사 등 거의 모든 것이 며느리의 주장으로 결정되는 판이니 당연했다. 2번은 손자. 공부한다고만 하면 모든 게 주어지고 면제되는 귀한 몸이다. 다음은 3번. 가장은 말뿐이고 집안 내 의사결정과정에서 거의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바로 아범의 위상이다.</P> <P><BR> 4번은 파출부. 늙은이 사는 집엔 와서 일하기도 꺼린다는 세상이라며 며느리 쪽에서 눈치를 더 살피고 부탁을 하는 상황이고 보면 틀린 판단 같지는 않았다. 그 다음은 모두의 귀염을 독차지하는 애완견 . 마지막 6번이 바로 김 할아버지. 강아지보다 못한 위상이라니 분통이 터질 일이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P> <P><BR> 지금 그 분은 가평 읍내에서 차로 20분쯤 북쪽으로 떨어진 곳에서 홀로 사신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날 그분의 아들은 뜻 모를 메모와 함께 갑자기 사라져버린 아버지를 한참이나 원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로 다시 오실 것을 종용했다지만 김 할아버지의 고집은 완강하다.</P> <P><BR> 김 할아버지의 상황은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니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다. 여기에 “그 분이 좀더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적응하셨더라면” 이라거나 “자식들이 부모 마음을 좀더 헤아릴 수 있었다면” 하는 식의 말은 그저 공허한 사족이 될 터이다. 며칠 남지 않은 5월은 가정의 달이라는데.</P> <P>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2002년 5월 23일 조용래 논설위원</SPAN></P>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P>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P>RE : “아범아, 아비는 갈란다” 글꼴 맑은고딕 굴림 바탕 궁서 돋움 Tahoma verdana 크기 8pt 9pt 12pt 14pt 18pt 24pt 36pt 원문 : “아범아, 아비는 갈란다”<P> 얼마 전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 김 할아버지는 살짝 아들집을 빠져 나왔다. 지겹디 지겨운 지난 몇 달 동안의 서울생활을 정리하려고 마음먹은 지 벌써 몇 주일. 더 이상 주저하다가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P> <P><BR> 당장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시골집마저 다 정리하고 올라온 처지에 갈 곳도 마땅치 않았고, 무엇보다 아들자식이 서울로 모셔간다고 부러워했던 가평의 고향 마을사람들 볼 낯이 없어 다시 주저앉곤 했다. 그렇지만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용기를 내어 결단을 하고 보니 마음도 한결 가뿐해져 좋아하는 ‘대전 부르스’까지 흥얼거렸다.</P> <P><BR>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그러고 보니 자식녀석에게 ‘말도 없이’ 떠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쓰는 글씨지만 그래도 아범에게 한마디라도 하고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신문에 끼어 들어오는 광고지 뒷면에 그 노래가사를 조금 흉내내 “3번아 잘 있거라 6번은 간다”고 썼다.</P> <P><BR> 처음엔 “아범아, 아비는 이제 다시 가평으로 갈란다”고 했다. 하지만 ‘기왕 떠나는 마당에 사람이 풍류가 있어야지’ 하는 생각에 그렇게 다시 고쳐 적었다. 물론 서울생활에 대한 불만을 아들자식 내외에 조금 내보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이지 그간의 불만이며 맘 고생을 말로 다하자면 울컥증이 앞서 말을 잇기조차 어려울 것이다.</P> <P><BR> 몹쓸 병으로 고생하던 할머니를 5년 전 하늘나라로 먼저 보내고 홀로 지내면서도 평생을 살던 고향이며, 몇 푼 안 되는 농사지만 일이 있었기에 견딜 만 했다. 하지만 여든을 눈앞에 두고 해가 갈수록 혼자 해먹는 밥이 귀찮아지면서 외로움이 더해 갔다. 그래서 입버릇처럼 서울가서 함께 살자는 큰아들 말에 못이긴 척 따라나섰다. 그게 지난겨울이었다.</P> <P><BR> 아파트에 사는 아들 내외는 구석방 하나를 비워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저희 살기도 바쁜 세상에 아비를 배려하는 품이 가상하다는 생각도 들어 미안한 마음이 늘 떠나지 않았지만 친구도 없고 소일거리조차 없는 하루하루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함께 사는 아들네 가족들과는 제대로 된 교통이 없었다. 시골에 살 때는 그래도 안부전화라도 있었는데.</P> <P><BR> 뭐가 그리도 바쁜지 아범은 늘 귀가가 늦었고 며느리는 외출이 잦았다. 하나 있는 손자는 학원이다 과외다 하며 차분히 얼굴 볼 기회도 별로 없을 지경이었다. 1주일에 두 번 오는 파출부 아줌마가 그래도 말상대가 됐지만 냄새 나는 시골 노인네로 취급당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주먹만한 강아지조차 뒤로 실실 빼는 꼴이 도무지 정분이 안 가는 생활이었다.</P> <P><BR> 점차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방 바깥으로 나오는 일도 줄었다. 그러면서도 방문 바깥에 늘 귀를 쫑긋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우두커니 방안에 앉아 이 집 식구들 가운데 자신의 위치는 과연 어느 정도인가를 고민하게 된 것도 그쯤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이 집 식구들의 중요도로 메긴 우선 순위가 보이기 시작했다.</P> <P><BR>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1번은 아들자식이 아니라 며느리였다. 손자의 교육문제을 비롯해 경제권 행사, 집안 대소사 등 거의 모든 것이 며느리의 주장으로 결정되는 판이니 당연했다. 2번은 손자. 공부한다고만 하면 모든 게 주어지고 면제되는 귀한 몸이다. 다음은 3번. 가장은 말뿐이고 집안 내 의사결정과정에서 거의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바로 아범의 위상이다.</P> <P><BR> 4번은 파출부. 늙은이 사는 집엔 와서 일하기도 꺼린다는 세상이라며 며느리 쪽에서 눈치를 더 살피고 부탁을 하는 상황이고 보면 틀린 판단 같지는 않았다. 그 다음은 모두의 귀염을 독차지하는 애완견 . 마지막 6번이 바로 김 할아버지. 강아지보다 못한 위상이라니 분통이 터질 일이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P> <P><BR> 지금 그 분은 가평 읍내에서 차로 20분쯤 북쪽으로 떨어진 곳에서 홀로 사신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날 그분의 아들은 뜻 모를 메모와 함께 갑자기 사라져버린 아버지를 한참이나 원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로 다시 오실 것을 종용했다지만 김 할아버지의 고집은 완강하다.</P> <P><BR> 김 할아버지의 상황은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니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다. 여기에 “그 분이 좀더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적응하셨더라면” 이라거나 “자식들이 부모 마음을 좀더 헤아릴 수 있었다면” 하는 식의 말은 그저 공허한 사족이 될 터이다. 며칠 남지 않은 5월은 가정의 달이라는데.</P> <P>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2002년 5월 23일 조용래 논설위원</SPAN></P>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P>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P>RE : “아범아, 아비는 갈란다” 비밀번호 작성 뒤로 목록
잠실희년교회 희년(禧年·The Jubilee)은 50년만에 잃었던 땅을 되찾고 노예가 풀려나는 은혜의 해입니다(레위기 25장). 안식·해방·복권의 희년은 시공을 뛰어넘어 요청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 희년 칼럼잠실희년교회에 오신걸 환경합니다. 제목 작성자이메일 홈주소 관련링크 공지등록 체크하면 게시글 상단에 고정 등록 됩니다. 글등록설정 체크하면 관리자에게만 이글이 공개됩니다 원문 : “아범아, 아비는 갈란다”<P> 얼마 전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 김 할아버지는 살짝 아들집을 빠져 나왔다. 지겹디 지겨운 지난 몇 달 동안의 서울생활을 정리하려고 마음먹은 지 벌써 몇 주일. 더 이상 주저하다가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P> <P><BR> 당장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시골집마저 다 정리하고 올라온 처지에 갈 곳도 마땅치 않았고, 무엇보다 아들자식이 서울로 모셔간다고 부러워했던 가평의 고향 마을사람들 볼 낯이 없어 다시 주저앉곤 했다. 그렇지만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용기를 내어 결단을 하고 보니 마음도 한결 가뿐해져 좋아하는 ‘대전 부르스’까지 흥얼거렸다.</P> <P><BR>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그러고 보니 자식녀석에게 ‘말도 없이’ 떠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쓰는 글씨지만 그래도 아범에게 한마디라도 하고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신문에 끼어 들어오는 광고지 뒷면에 그 노래가사를 조금 흉내내 “3번아 잘 있거라 6번은 간다”고 썼다.</P> <P><BR> 처음엔 “아범아, 아비는 이제 다시 가평으로 갈란다”고 했다. 하지만 ‘기왕 떠나는 마당에 사람이 풍류가 있어야지’ 하는 생각에 그렇게 다시 고쳐 적었다. 물론 서울생활에 대한 불만을 아들자식 내외에 조금 내보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이지 그간의 불만이며 맘 고생을 말로 다하자면 울컥증이 앞서 말을 잇기조차 어려울 것이다.</P> <P><BR> 몹쓸 병으로 고생하던 할머니를 5년 전 하늘나라로 먼저 보내고 홀로 지내면서도 평생을 살던 고향이며, 몇 푼 안 되는 농사지만 일이 있었기에 견딜 만 했다. 하지만 여든을 눈앞에 두고 해가 갈수록 혼자 해먹는 밥이 귀찮아지면서 외로움이 더해 갔다. 그래서 입버릇처럼 서울가서 함께 살자는 큰아들 말에 못이긴 척 따라나섰다. 그게 지난겨울이었다.</P> <P><BR> 아파트에 사는 아들 내외는 구석방 하나를 비워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저희 살기도 바쁜 세상에 아비를 배려하는 품이 가상하다는 생각도 들어 미안한 마음이 늘 떠나지 않았지만 친구도 없고 소일거리조차 없는 하루하루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함께 사는 아들네 가족들과는 제대로 된 교통이 없었다. 시골에 살 때는 그래도 안부전화라도 있었는데.</P> <P><BR> 뭐가 그리도 바쁜지 아범은 늘 귀가가 늦었고 며느리는 외출이 잦았다. 하나 있는 손자는 학원이다 과외다 하며 차분히 얼굴 볼 기회도 별로 없을 지경이었다. 1주일에 두 번 오는 파출부 아줌마가 그래도 말상대가 됐지만 냄새 나는 시골 노인네로 취급당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주먹만한 강아지조차 뒤로 실실 빼는 꼴이 도무지 정분이 안 가는 생활이었다.</P> <P><BR> 점차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방 바깥으로 나오는 일도 줄었다. 그러면서도 방문 바깥에 늘 귀를 쫑긋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우두커니 방안에 앉아 이 집 식구들 가운데 자신의 위치는 과연 어느 정도인가를 고민하게 된 것도 그쯤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이 집 식구들의 중요도로 메긴 우선 순위가 보이기 시작했다.</P> <P><BR>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1번은 아들자식이 아니라 며느리였다. 손자의 교육문제을 비롯해 경제권 행사, 집안 대소사 등 거의 모든 것이 며느리의 주장으로 결정되는 판이니 당연했다. 2번은 손자. 공부한다고만 하면 모든 게 주어지고 면제되는 귀한 몸이다. 다음은 3번. 가장은 말뿐이고 집안 내 의사결정과정에서 거의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바로 아범의 위상이다.</P> <P><BR> 4번은 파출부. 늙은이 사는 집엔 와서 일하기도 꺼린다는 세상이라며 며느리 쪽에서 눈치를 더 살피고 부탁을 하는 상황이고 보면 틀린 판단 같지는 않았다. 그 다음은 모두의 귀염을 독차지하는 애완견 . 마지막 6번이 바로 김 할아버지. 강아지보다 못한 위상이라니 분통이 터질 일이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P> <P><BR> 지금 그 분은 가평 읍내에서 차로 20분쯤 북쪽으로 떨어진 곳에서 홀로 사신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날 그분의 아들은 뜻 모를 메모와 함께 갑자기 사라져버린 아버지를 한참이나 원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로 다시 오실 것을 종용했다지만 김 할아버지의 고집은 완강하다.</P> <P><BR> 김 할아버지의 상황은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니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다. 여기에 “그 분이 좀더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적응하셨더라면” 이라거나 “자식들이 부모 마음을 좀더 헤아릴 수 있었다면” 하는 식의 말은 그저 공허한 사족이 될 터이다. 며칠 남지 않은 5월은 가정의 달이라는데.</P> <P>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2002년 5월 23일 조용래 논설위원</SPAN></P>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P>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P>RE : “아범아, 아비는 갈란다” 글꼴 맑은고딕 굴림 바탕 궁서 돋움 Tahoma verdana 크기 8pt 9pt 12pt 14pt 18pt 24pt 36pt 원문 : “아범아, 아비는 갈란다”<P> 얼마 전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 김 할아버지는 살짝 아들집을 빠져 나왔다. 지겹디 지겨운 지난 몇 달 동안의 서울생활을 정리하려고 마음먹은 지 벌써 몇 주일. 더 이상 주저하다가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P> <P><BR> 당장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시골집마저 다 정리하고 올라온 처지에 갈 곳도 마땅치 않았고, 무엇보다 아들자식이 서울로 모셔간다고 부러워했던 가평의 고향 마을사람들 볼 낯이 없어 다시 주저앉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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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골 노인네로 취급당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주먹만한 강아지조차 뒤로 실실 빼는 꼴이 도무지 정분이 안 가는 생활이었다.</P> <P><BR> 점차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방 바깥으로 나오는 일도 줄었다. 그러면서도 방문 바깥에 늘 귀를 쫑긋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우두커니 방안에 앉아 이 집 식구들 가운데 자신의 위치는 과연 어느 정도인가를 고민하게 된 것도 그쯤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이 집 식구들의 중요도로 메긴 우선 순위가 보이기 시작했다.</P> <P><BR>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1번은 아들자식이 아니라 며느리였다. 손자의 교육문제을 비롯해 경제권 행사, 집안 대소사 등 거의 모든 것이 며느리의 주장으로 결정되는 판이니 당연했다. 2번은 손자. 공부한다고만 하면 모든 게 주어지고 면제되는 귀한 몸이다. 다음은 3번. 가장은 말뿐이고 집안 내 의사결정과정에서 거의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바로 아범의 위상이다.</P> <P><BR> 4번은 파출부. 늙은이 사는 집엔 와서 일하기도 꺼린다는 세상이라며 며느리 쪽에서 눈치를 더 살피고 부탁을 하는 상황이고 보면 틀린 판단 같지는 않았다. 그 다음은 모두의 귀염을 독차지하는 애완견 . 마지막 6번이 바로 김 할아버지. 강아지보다 못한 위상이라니 분통이 터질 일이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P> <P><BR> 지금 그 분은 가평 읍내에서 차로 20분쯤 북쪽으로 떨어진 곳에서 홀로 사신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날 그분의 아들은 뜻 모를 메모와 함께 갑자기 사라져버린 아버지를 한참이나 원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로 다시 오실 것을 종용했다지만 김 할아버지의 고집은 완강하다.</P> <P><BR> 김 할아버지의 상황은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니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다. 여기에 “그 분이 좀더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적응하셨더라면” 이라거나 “자식들이 부모 마음을 좀더 헤아릴 수 있었다면” 하는 식의 말은 그저 공허한 사족이 될 터이다. 며칠 남지 않은 5월은 가정의 달이라는데.</P> <P>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2002년 5월 23일 조용래 논설위원</SPAN></P>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P>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P>RE : “아범아, 아비는 갈란다” 비밀번호 작성 뒤로 목록
제목 작성자이메일 홈주소 관련링크 공지등록 체크하면 게시글 상단에 고정 등록 됩니다. 글등록설정 체크하면 관리자에게만 이글이 공개됩니다 원문 : “아범아, 아비는 갈란다”<P> 얼마 전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 김 할아버지는 살짝 아들집을 빠져 나왔다. 지겹디 지겨운 지난 몇 달 동안의 서울생활을 정리하려고 마음먹은 지 벌써 몇 주일. 더 이상 주저하다가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P> <P><BR> 당장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시골집마저 다 정리하고 올라온 처지에 갈 곳도 마땅치 않았고, 무엇보다 아들자식이 서울로 모셔간다고 부러워했던 가평의 고향 마을사람들 볼 낯이 없어 다시 주저앉곤 했다. 그렇지만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용기를 내어 결단을 하고 보니 마음도 한결 가뿐해져 좋아하는 ‘대전 부르스’까지 흥얼거렸다.</P> <P><BR>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그러고 보니 자식녀석에게 ‘말도 없이’ 떠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쓰는 글씨지만 그래도 아범에게 한마디라도 하고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신문에 끼어 들어오는 광고지 뒷면에 그 노래가사를 조금 흉내내 “3번아 잘 있거라 6번은 간다”고 썼다.</P> <P><BR> 처음엔 “아범아, 아비는 이제 다시 가평으로 갈란다”고 했다. 하지만 ‘기왕 떠나는 마당에 사람이 풍류가 있어야지’ 하는 생각에 그렇게 다시 고쳐 적었다. 물론 서울생활에 대한 불만을 아들자식 내외에 조금 내보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이지 그간의 불만이며 맘 고생을 말로 다하자면 울컥증이 앞서 말을 잇기조차 어려울 것이다.</P> <P><BR> 몹쓸 병으로 고생하던 할머니를 5년 전 하늘나라로 먼저 보내고 홀로 지내면서도 평생을 살던 고향이며, 몇 푼 안 되는 농사지만 일이 있었기에 견딜 만 했다. 하지만 여든을 눈앞에 두고 해가 갈수록 혼자 해먹는 밥이 귀찮아지면서 외로움이 더해 갔다. 그래서 입버릇처럼 서울가서 함께 살자는 큰아들 말에 못이긴 척 따라나섰다. 그게 지난겨울이었다.</P> <P><BR> 아파트에 사는 아들 내외는 구석방 하나를 비워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저희 살기도 바쁜 세상에 아비를 배려하는 품이 가상하다는 생각도 들어 미안한 마음이 늘 떠나지 않았지만 친구도 없고 소일거리조차 없는 하루하루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함께 사는 아들네 가족들과는 제대로 된 교통이 없었다. 시골에 살 때는 그래도 안부전화라도 있었는데.</P> <P><BR> 뭐가 그리도 바쁜지 아범은 늘 귀가가 늦었고 며느리는 외출이 잦았다. 하나 있는 손자는 학원이다 과외다 하며 차분히 얼굴 볼 기회도 별로 없을 지경이었다. 1주일에 두 번 오는 파출부 아줌마가 그래도 말상대가 됐지만 냄새 나는 시골 노인네로 취급당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주먹만한 강아지조차 뒤로 실실 빼는 꼴이 도무지 정분이 안 가는 생활이었다.</P> <P><BR> 점차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방 바깥으로 나오는 일도 줄었다. 그러면서도 방문 바깥에 늘 귀를 쫑긋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우두커니 방안에 앉아 이 집 식구들 가운데 자신의 위치는 과연 어느 정도인가를 고민하게 된 것도 그쯤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이 집 식구들의 중요도로 메긴 우선 순위가 보이기 시작했다.</P> <P><BR>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1번은 아들자식이 아니라 며느리였다. 손자의 교육문제을 비롯해 경제권 행사, 집안 대소사 등 거의 모든 것이 며느리의 주장으로 결정되는 판이니 당연했다. 2번은 손자. 공부한다고만 하면 모든 게 주어지고 면제되는 귀한 몸이다. 다음은 3번. 가장은 말뿐이고 집안 내 의사결정과정에서 거의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바로 아범의 위상이다.</P> <P><BR> 4번은 파출부. 늙은이 사는 집엔 와서 일하기도 꺼린다는 세상이라며 며느리 쪽에서 눈치를 더 살피고 부탁을 하는 상황이고 보면 틀린 판단 같지는 않았다. 그 다음은 모두의 귀염을 독차지하는 애완견 . 마지막 6번이 바로 김 할아버지. 강아지보다 못한 위상이라니 분통이 터질 일이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P> <P><BR> 지금 그 분은 가평 읍내에서 차로 20분쯤 북쪽으로 떨어진 곳에서 홀로 사신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날 그분의 아들은 뜻 모를 메모와 함께 갑자기 사라져버린 아버지를 한참이나 원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로 다시 오실 것을 종용했다지만 김 할아버지의 고집은 완강하다.</P> <P><BR> 김 할아버지의 상황은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니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다. 여기에 “그 분이 좀더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적응하셨더라면” 이라거나 “자식들이 부모 마음을 좀더 헤아릴 수 있었다면” 하는 식의 말은 그저 공허한 사족이 될 터이다. 며칠 남지 않은 5월은 가정의 달이라는데.</P> <P>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2002년 5월 23일 조용래 논설위원</SPAN></P>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P>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P>RE : “아범아, 아비는 갈란다” 글꼴 맑은고딕 굴림 바탕 궁서 돋움 Tahoma verdana 크기 8pt 9pt 12pt 14pt 18pt 24pt 36pt 원문 : “아범아, 아비는 갈란다”<P> 얼마 전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 김 할아버지는 살짝 아들집을 빠져 나왔다. 지겹디 지겨운 지난 몇 달 동안의 서울생활을 정리하려고 마음먹은 지 벌써 몇 주일. 더 이상 주저하다가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P> <P><BR> 당장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시골집마저 다 정리하고 올라온 처지에 갈 곳도 마땅치 않았고, 무엇보다 아들자식이 서울로 모셔간다고 부러워했던 가평의 고향 마을사람들 볼 낯이 없어 다시 주저앉곤 했다. 그렇지만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용기를 내어 결단을 하고 보니 마음도 한결 가뿐해져 좋아하는 ‘대전 부르스’까지 흥얼거렸다.</P> <P><BR>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그러고 보니 자식녀석에게 ‘말도 없이’ 떠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쓰는 글씨지만 그래도 아범에게 한마디라도 하고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신문에 끼어 들어오는 광고지 뒷면에 그 노래가사를 조금 흉내내 “3번아 잘 있거라 6번은 간다”고 썼다.</P> <P><BR> 처음엔 “아범아, 아비는 이제 다시 가평으로 갈란다”고 했다. 하지만 ‘기왕 떠나는 마당에 사람이 풍류가 있어야지’ 하는 생각에 그렇게 다시 고쳐 적었다. 물론 서울생활에 대한 불만을 아들자식 내외에 조금 내보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이지 그간의 불만이며 맘 고생을 말로 다하자면 울컥증이 앞서 말을 잇기조차 어려울 것이다.</P> <P><BR> 몹쓸 병으로 고생하던 할머니를 5년 전 하늘나라로 먼저 보내고 홀로 지내면서도 평생을 살던 고향이며, 몇 푼 안 되는 농사지만 일이 있었기에 견딜 만 했다. 하지만 여든을 눈앞에 두고 해가 갈수록 혼자 해먹는 밥이 귀찮아지면서 외로움이 더해 갔다. 그래서 입버릇처럼 서울가서 함께 살자는 큰아들 말에 못이긴 척 따라나섰다. 그게 지난겨울이었다.</P> <P><BR> 아파트에 사는 아들 내외는 구석방 하나를 비워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저희 살기도 바쁜 세상에 아비를 배려하는 품이 가상하다는 생각도 들어 미안한 마음이 늘 떠나지 않았지만 친구도 없고 소일거리조차 없는 하루하루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함께 사는 아들네 가족들과는 제대로 된 교통이 없었다. 시골에 살 때는 그래도 안부전화라도 있었는데.</P> <P><BR> 뭐가 그리도 바쁜지 아범은 늘 귀가가 늦었고 며느리는 외출이 잦았다. 하나 있는 손자는 학원이다 과외다 하며 차분히 얼굴 볼 기회도 별로 없을 지경이었다. 1주일에 두 번 오는 파출부 아줌마가 그래도 말상대가 됐지만 냄새 나는 시골 노인네로 취급당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주먹만한 강아지조차 뒤로 실실 빼는 꼴이 도무지 정분이 안 가는 생활이었다.</P> <P><BR> 점차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방 바깥으로 나오는 일도 줄었다. 그러면서도 방문 바깥에 늘 귀를 쫑긋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우두커니 방안에 앉아 이 집 식구들 가운데 자신의 위치는 과연 어느 정도인가를 고민하게 된 것도 그쯤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이 집 식구들의 중요도로 메긴 우선 순위가 보이기 시작했다.</P> <P><BR>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1번은 아들자식이 아니라 며느리였다. 손자의 교육문제을 비롯해 경제권 행사, 집안 대소사 등 거의 모든 것이 며느리의 주장으로 결정되는 판이니 당연했다. 2번은 손자. 공부한다고만 하면 모든 게 주어지고 면제되는 귀한 몸이다. 다음은 3번. 가장은 말뿐이고 집안 내 의사결정과정에서 거의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바로 아범의 위상이다.</P> <P><BR> 4번은 파출부. 늙은이 사는 집엔 와서 일하기도 꺼린다는 세상이라며 며느리 쪽에서 눈치를 더 살피고 부탁을 하는 상황이고 보면 틀린 판단 같지는 않았다. 그 다음은 모두의 귀염을 독차지하는 애완견 . 마지막 6번이 바로 김 할아버지. 강아지보다 못한 위상이라니 분통이 터질 일이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P> <P><BR> 지금 그 분은 가평 읍내에서 차로 20분쯤 북쪽으로 떨어진 곳에서 홀로 사신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날 그분의 아들은 뜻 모를 메모와 함께 갑자기 사라져버린 아버지를 한참이나 원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로 다시 오실 것을 종용했다지만 김 할아버지의 고집은 완강하다.</P> <P><BR> 김 할아버지의 상황은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니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다. 여기에 “그 분이 좀더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적응하셨더라면” 이라거나 “자식들이 부모 마음을 좀더 헤아릴 수 있었다면” 하는 식의 말은 그저 공허한 사족이 될 터이다. 며칠 남지 않은 5월은 가정의 달이라는데.</P> <P>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2002년 5월 23일 조용래 논설위원</SPAN></P>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P> <P class=바탕글 align=right><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P>RE : “아범아, 아비는 갈란다” 비밀번호 작성 뒤로 목록